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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틀어졌을 때 빨리 사과하는 게 정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그게 꼭 맞는 말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제때 봉합하지 못한 균열이 시간과 함께 어떻게 벌어지는지,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버텨내는지를 보면서 관계에 대한 생각이 꽤 많이 바뀌었습니다.
균열: 금이 간 관계는 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지는가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저는 처음엔 "좀 있으면 풀리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경험상 느낀 건, 금이 가기 시작한 관계는 대화라는 본드로 최단 시간 내에 메꾸지 않으면, 이후로는 등비수열처럼 균열의 크기가 커진다는 겁니다. 등비수열(等比數列)이란 앞 항에 일정한 비율을 계속 곱해 나가는 수열로, 처음엔 작아 보이던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는 구조를 말합니다. 관계의 균열이 딱 그렇습니다.
어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오랜 세월 사랑을 간장게장으로 표현해온 언니와 동생. 그 언니 편을 들어줬어야 할 순간에 동생이 냉정하게 말 한마디를 내뱉었고, 전화를 끊으면서 손이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 떨림이 전부였습니다. 사과 한마디가 나오지 않은 채 흐지부지됐고, 간장게장은 어느 순간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각자의 삶으로 흩어진 거죠.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분명히 제가 먼저 말을 꺼내면 풀릴 것 같은데, 그 "먼저"가 너무 어려운 겁니다. 그 사이에 시간이 쌓이고, 어색함이 쌓이고, 결국 "이제 와서 연락하면 더 이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균열을 메웠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체념이 그 자리를 채운 거죠. 관계심리학(Relationship Psychology) 분야에서는 이를 '갈등 회피 패턴(conflict avoidance pattern)'이라고 부릅니다. 갈등을 직면하지 않고 우회하다 보면, 결국 관계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균열이 아무리 깊어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7년 만에 연락이 닿은 두 사람도 결혼 소식 하나로 다시 이어졌으니까요. 갈등이 관계를 끝내는 게 아니라, 그 갈등을 외면하는 태도가 관계를 끝낸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트라우마: 멀리서 박수 치는 것도 사랑의 방식이다
트라우마(trauma)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 경험이 심리적 상처로 남아 일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뜻합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서 있을 때, 악플이 해일처럼 밀려올 때,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기사가 터질 때.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어떻게 버티냐고요? 제가 직접 겪어본 건 아니지만, 그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같으면 그냥 없어지고 싶다"고요.
장례식장에서 "이제부터 더 험난한 일이 시작될 거야"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위로가 아니라 경고였는데, 오히려 그 말이 버팀목이 됐다는 거죠. 그리고 모두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을 때, 한 사람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병실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 모습 하나가 어떤 위로보다 더 깊이 닿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많이 자책했습니다. 누군가 힘든 상황일 때 저는 해결책을 먼저 들이밀거나, "이렇게 해봐"를 반복하는 쪽이었거든요. 그게 제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는데, 정작 상대가 필요한 건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이었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연구에서는 이를 '정서적 지지(emotional support)'와 '도구적 지지(instrumental support)'로 구분합니다. 정서적 지지란 판단 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 도구적 지지란 실질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위기 상황일수록 사람들이 더 필요로 하는 건 대개 전자라는 연구 결과가 많습니다. (출처: NIH - Social Support and Health)
그렇다고 멀리서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틀린 건 아닙니다. 각자가 지나온 상처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너무 아팠던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왜 연락 안 했어?"라는 말은 가혹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던 것도, 그것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을 겁니다.
- 트라우마가 남은 사람에게 "왜 그때 더 강하게 맞서지 않았냐"는 질문은 상처를 덧낸다.
-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이 있다. 해결책보다 존재가 먼저다.
- 멀리서 응원하는 것도 하나의 사랑 방식이지만, 그 사실을 상대에게 직접 말해주는 것이 더 낫다.
- 트라우마 회복에는 강제된 직면보다 자연스러운 일상 복귀가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낙지탕탕이를 시켜놓고 "미래에 대한 얘기를 안 했다"는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언제 복귀할 거냐, 그런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같이 먹은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가장 단단한 형태의 곁이었습니다.
일상: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가장 어렵다
제가 한동안 우울한 시기를 보낼 때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뭔가 특별한 걸 해야 나아지는 게 아니야. 그냥 밥 먹고 자고 청소하는 거, 그걸 유지하는 게 먼저야." 그때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습니다. 너무 뻔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그 평범한 하루를 유지하는 게 그 시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네이버에 올라온 오열 사진을 지워달라고 했을 때 "웃는 얼굴로 덮으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결국 그 한마디가 삶의 가치관이 됐다고 했죠. 지울 수 없으면 더 좋은 걸로 덮으면 된다. 이게 단순한 위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저는 이게 인지 재구성(Cognitive Reframing) 전략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지 재구성이란 부정적인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 감정 반응을 바꾸는 심리 기법으로,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의 핵심 도구 중 하나입니다. (출처: APA -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저도 비슷한 방식을 씁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올 때 그걸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흙탕물이 가득한 컵에 맑은 물을 계속 넣어주는 거죠. 더 맛있는 걸 먹고, 더 오래 자고, 몸을 조금 더 쓰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일상을 회복하는 방식입니다. 특별한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원형(原形)의 하루를 묵묵히 반복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으니까요.
전장에서 창에 찔린 채로는 싸울 수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딘가 숨어서 상처가 아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 숨는 시간이 회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시간 동안 밥을 먹고 장을 보고 책을 읽는 것이 결국 회복의 재료가 됩니다. 이겨내야겠다는 다짐보다, 오늘 하루를 그냥 살아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관계에서, 상처에서, 일상에서.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이 세 가지가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균열을 봉합하는 용기, 곁에 있어주는 침묵, 아무 일 없는 듯 밥 먹는 평범함. 지금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오늘이 누군가에겐 간절히 원했던 하루일 수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쌓여 있다면, 더 좋은 것들로 그 위를 덮어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구력(久歷)을 쌓아가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