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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려고 누웠는데 2년 전 그날 장면이 불쑥 떠오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적금 통장을 깨던 날, 처음 주식 앱을 켜던 날. 그게 왜 하필 새벽 두 시에 나타나는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은 결말도 대사도 그대로인 채 반복 재생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반복을 멈추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반추, 뇌가 과거에 갇히는 방식
과거를 떠올리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끝없이 되새기는 것인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추(rumination)라고 부릅니다. 반추란 특정 사건이나 감정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머릿속에서 계속 굴리는 행동을 뜻합니다. 단순한 회상과 달리, 반추는 감정의 온도를 높이고 부정적인 기억일수록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특성이 있습니다.
저도 그 시절을 꽤 오래 반추했습니다. 1년도 안 되어 모아둔 적금을 다 날리고 빚까지 졌던 그 시간을. 왜 그랬을까, 왜 하필 그때 그 종목을, 왜 손절을 못 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성찰이 되려면 거기서 무언가를 건져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재생만 하는 건 성찰이 아니라 자책입니다. 두 가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찰은 현재를 바꾸는 재료가 되고, 자책은 현재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분야에서는 반추가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악화시키는 핵심 기제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인지행동치료란 생각의 패턴을 바꿔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는 심리 치료 방식입니다. 미국심리학회(APA)에 따르면 반추적 사고는 감정 조절 능력을 저하시키고 문제 해결력도 함께 떨어뜨린다고 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그러니 반추가 깊어지는 것을 방치하는 건, 뇌에게 그냥 계속 혼자 고통받으라고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주의 전환, 생각이 아닌 몸으로 빠져나오는 법
그럼 반추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저는 한동안 "그만 생각해야지"를 반복했는데, 이게 효과가 없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생각으로 생각을 막으려 하면 오히려 그 생각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동 효과(rebound effect)라고 부르는데, 반동 효과란 특정 생각을 억누르려 할수록 오히려 그 생각이 더 강하게 떠오르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방향을 바꿨습니다. 생각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게 아니라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겁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제가 먼저 하는 건 청소기를 드는 것이었습니다. 15분 정도 청소기를 돌리면서 그 소리와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까 그 무거운 장면이 조금 흐릿해져 있습니다. 주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이게 단순한 기분 전환처럼 들릴 수 있는데, 사실 뇌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방식입니다. 주의 전환(attentional shift)이란 의식적으로 주의를 다른 대상으로 이동시켜 부정적 사고의 고리를 끊는 방법입니다. 걷기나 신체 활동이 특히 효과적인 이유는, 우리 뇌가 동시에 여러 복잡한 과제를 빠르게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을 쓰는 쪽으로 자원이 쏠리면 반추에 쓰이던 자원이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걷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싶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걷는 동안 오감이 자극되면서 생각의 무게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15~20분 걷기가 커피 두 잔보다 머리를 더 맑게 만들었습니다. 부정적 감정의 온도가 낮아지는 게 정말 있는 일이더라고요. 주의 전환을 제대로 써먹기 시작한 뒤로는 그 새벽 두 시의 재생 빈도가 확실히 줄었습니다.
부정적 생각이 찾아올 때 활용할 수 있는 주의 전환 방법을 제가 써본 순서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청소기 돌리기 — 소음과 움직임이 주의를 즉각적으로 분산시킵니다. 15분이면 집도 깨끗해지고 머리도 가벼워집니다.
- 걷기 — 야외라면 더 좋지만 실내도 괜찮습니다. 걸으면서 발바닥의 감촉, 주변 소리에 의식적으로 집중합니다.
- 빈 종이에 낙서하거나 읽던 책 구절 따라 쓰기 — 손을 움직이는 행위가 생각의 방향을 바꿔줍니다. 이건 제가 지금도 가장 자주 쓰는 방법입니다.
뇌 가소성, 독서가 뇌를 다시 만드는 방식
주의 전환을 연습하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독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학창 시절 독서는 저에게 독후감이었습니다. 원하지도 않는 책을 읽고 종이 한 장을 꾸역꾸역 채우는 일. 그게 독서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0대 중반이 지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독서가 단순히 정보를 얻는 행위가 아니라는 건, 2013년 미국 에모리대학교의 연구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연구진이 피험자들에게 소설을 읽게 한 뒤 뇌를 촬영했더니, 글자를 이해하는 언어 영역만이 아니라 움직임이나 촉각과 관련된 감각 영역까지 활성화된 것이 확인됐습니다(출처: Emory University News). 뇌가 책 속 장면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뇌 가소성(neuroplasticity)이 있습니다. 뇌 가소성이란 뇌가 새로운 자극과 경험에 반응하여 구조와 기능을 스스로 바꾸는 능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뇌는 고정된 기관이 아니라, 어떤 자극을 주느냐에 따라 계속 변한다는 겁니다. 인지과학자 메리엔 울프는 저서 "책 읽는 뇌"에서 깊은 읽기(deep reading)가 비판적 사고, 추론, 상상력 같은 고차원적 인지 능력을 키운다고 설명합니다. 깊은 읽기란 글자를 단순히 해독하는 것을 넘어 내용을 곱씹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 짓는 독서 방식입니다.
독서는 단순 취미라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로 써보니 독서의 효과는 책을 읽는 순간보다 읽은 뒤에 더 크게 나타납니다. 주식 손실 이후 제가 다시 독서를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10페이지도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쇼츠와 릴스에 길들여진 뇌가 긴 호흡의 글을 거부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2주쯤 지나니 달라졌습니다. 같은 시간에 영상보다 책이 더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뇌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독서가 반추를 줄이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점에 가장 동의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뇌는 그 세계에 몰입하기 때문에, 주의 전환의 효과와 깊은 사고의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마음이 흔들릴 때 읽던 책의 구절을 빈 종이에 따라 쓰는 습관을 들였는데, 이게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닻이 되어줬습니다.
후회는 없애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년 전 엎질러 버린 적금과 빚이 지금의 저를 만든 콘크리트 속 철근이 된 것처럼, 후회를 자책의 재료로 쓸지 성장의 재료로 쓸지는 결국 본인의 선택입니다. 반추가 시작될 때 몸을 움직이고, 흔들릴 때 책을 펼치는 것. 그 두 가지 습관이 지금의 저를 조금씩 바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느리지만, 분명히 쌓이고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심리 상담이나 금융 조언이 아닙니다.